**미워하지 말라**
-정산 김용관-
우리가 일생동안 살면서
수 만 가지 일을 겪으면서 산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좋은 일이 됐든 궂은 일이 됐든 모두
나를 피해서 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를 피해 가는 것들은 죽어 있는 것이고
말이 없는 것들이다.
내가 살아 있기에 살아 있는 것들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만일 내가 죽었다고 가정을 해 보자.
그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내가 살아 있다는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모든 일을 맞을 일이다.
Hosea, Ballou는 그의 수서설교집 (手書說敎集)에서
“ 증오는 자책이다.”라고 했다
Hatred is self-punishment.
자책(自責) 무슨 뜻인가.
양심에 거리끼어 스스로 자기를 책망한다는 뜻이다.
반성과 참회의 뜻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미 저지른
잘못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증오(憎惡)가 자책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말할 때 남을 미워하려면
내 마음부터 괴롭다 한다.
말하자면 증오심 하나를 상대자에게
주기 위해서 내가 먼저 아픔을 맛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항상 증오하는 마음에는
자기 자신 안에 정착 된 분노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버리는 수련이 필요하다.
이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온갖 궂은 일을
다 겪으면서 터득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다.
미워할수록 더 가까이 해서 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것은 감정이란 묘한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성의 감정을 어떻게 스스로
부리느냐에 따라서 표현은 달라지겠지만
일생을 살면서 쉽게는 다룰 수가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증오하는데도 불신이 따르게 마련이다.
우선 불신의 벽부터 허물고 살고 볼 일이다.
믿음은 마음과 마음을 묶는 우주다.
이것이 허물어지면 먼저 불신이 싹트고
끝에는 증오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워가 쓴 <비관주의 연구>라는 글을 보자.
거기에는
“ 증오는 가슴에서 나오고 경멸(輕蔑)은 머리에서 나온다.
어느 감정도 완전히 우리의 제어하(制御下)에 있지 않는다.”
(Hatred comes from the heart; contempt from the head;
and neither feeling is quite within our control.)
이처럼 내가 자유자제로 할 수 있는
가슴과 마음이 우리 인간에게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돌출행동이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증오도 경멸도 우리가 제어 하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칡넝쿨처럼 엉켜서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
증오와 경멸을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
제어가 안 된다면 오장육부를
도려내 놓고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달콤한 말은 없다.
(Ther,s nothing in this world so sweet as love)
그 다음 달콤한 말은 가장 쉽게 얻어지는 것이 미움이다.
언제나 미움이란 말은
사랑 뒤에 숨어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미움을 묻어버려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 적다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가슴이 넓어야 한다.
그냥 넓은 게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쌓아야 한다.
자기가 아는 것이 적으면 많이 아는 사람을 미워한다든가,
부러워하는 것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
이 또한 인간의 감정이니 쉽지는 않겠지만
나폴레옹의 말을 새기면 조금은 미움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나폴레옹의 어록에서 “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A true man hates no one)라고 했다.
자애심은 언제나 영원하지만 증오는 순간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영원히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홈페이지 : www.poet.co.kr/k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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